[야옹다옹] 삼성 방출 서동환, '미국 무대 도전한다'

카스포인트 | 기사입력 2016-12-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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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환(팀사랑모아)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내년 2월 샌디에이고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 신분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정식 계약 여부에 대해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스프링캠프가 서동환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하는 쇼케이스가 되는 셈이다. 서동환은 “죽기 전에 야구선수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아보고 싶었다.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이다. 내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싶다”고 말했다.

 도전을 선택하기까지, 그는 순탄하지 않은 야구 인생을 살았다. 2005년 입단 계약금 5억원. 신일고 출신으로 당시 서동환은 ‘고교 투수 최대어’로 주목을 받으며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데뷔 첫 해 마무리투수라는 묵직한 보직까지 맡았지만, 기대와 달리 그의 프로 생활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두 번의 허리수술과 세 번의 팔꿈치 수술(뼛조각 제거 포함)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임의 탈퇴 그리고 복귀, 2013년 11월에는 2차 드래프트로 삼성으로 이적하며 야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나 싶었지만, 끝내 방출이라는 무거운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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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는 반대로 “힘든 시간들이 있었기에 도전을 선택하기가 수월했다”고 말한다. 벼랑 끝까지 몰린 순간, 꿈을 이루고 싶은 절실함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진출은 예전부터 갖고 있던 꿈이었다. 남들은 무모한 도전이라며 비웃을지 몰라도 안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도전하게 됐다. 지금 아니면 영영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샌디에이고 아시아 지역 스카우트 남궁훈 씨와 스포츠선수 후원팀인 팀사람모아에 합류시켜준 백승희 원장이 그의 미국 진출에 힘을 실어줬다. 남편의 도전을 위해 흔쾌히 먼 미국까지 함께 떠나는 아내의 결정과 응원은 더 할 나위 없는 좋은 원동력이 됐다.

 찬바람이 제법 불던 12월의 어느 날, 서울 모처의 카페에서 서동환을 만났다. 내년 1월 미국 출국을 앞두고 개인 훈련과 짐 정리에 여념이 없다는 그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서동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안정된 삶’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그의 도전은 무모하리만큼 대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서동환의 도전은 시작 전에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일이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 힘든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미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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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시즌 후 삼성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후 미국 진출을 선택했는데, 도전에 대한 생각은 그 이전부터 있었나.

서동환  “두산에 있었을 때부터 미국 무대에 대한 꿈이 강했다. ‘언젠가는 꼭 갈 것이다’라는 생각에 영어공부도 꾸준히 했다. 만약 선수로 못 뛰더라도 프런트가 돼서라도 가고 싶었다. 이번에 미국 진출을 결정하고 주위에 알렸는데, 동료들이 ‘너 결국 가는구나’ 라는 반응을 보이더라. 방출 전에 구단에 미국에 관한 얘기를 했고, 구단에서는 방출 통보를 내려줬다. 두산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뒤에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렇다 할 기록도 없이 떠나게 됐다. 구단에는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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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만큼 프로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프로 입단 당시 ‘고교 투수 최대어’로 불리며 오승환(세인트루이스) 보다 앞선 지명을 받기도 했었는데.

서동환  “프로에 입단했을 때에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때는 ‘무인도 사서 호텔 짓는 것’이 내 목표였다. 야구만 잘하면 돈도 그만큼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프로에 들어와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루틴을 짜서 움직였다. 하지만, 모든 게 예전만 못했다. 입단하자마자 투구폼 수정에 시달려야했고, 투구폼이 바뀌고 나서는 마운드에 올라가서 타자와 싸우는 대신 나와 싸우게 됐다. ‘확실한 내 것이 있었다면’이라는 후회가 가장 많이 든다. 그때는 경기가 잘 풀려도 불안했다. 어떻게 던진 건지 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산에 있으면서 ‘1년에 한 번 잘하는 선수’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가 얻어 걸린 경기인 것이다. 동기들이 잘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김경문 감독님이 계셨기에 버텼던 것 같다.”

- 김경문 감독 덕에 버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서동환  “내가 신인임에도 마무리 보직을 맡기셨다. 결과가 좋지 않아 비난을 많이 받으셨지만, 그때마다 도리어 나를 걱정해주셨다. 경기 끝나면 데리고 나가서 고기도 사주셨고, 어깨 펴고 다니라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두산에서 김경문 감독님과 함께 있으면서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늘 감독님께 죄송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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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겪기도 했다. 2009년부터 2년간은 팔꿈치 수술과 임의 탈퇴 등의 홍역을 겪기도 했는데.

서동환  “임의탈퇴가 된 후에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어도 공부하고 여러 사회경험을 쌓으면서 야구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너무 힘들고 지쳐있었다. 그러고 시간이 조금 지나니 역시나 야구 생각이 다시 나더라. 그동안 자책했던 것들을 없애고 여러 조언들을 떠올리고 나니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결국 나는 야구밖에 할 것이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 2013년에 삼성으로 이적한 후, 야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고자하는 의지가 강했다.

서동환  “신혼집까지 다 꾸려놓은 상황에서 이적이 결정된 것이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 마저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산에서 못 다 피운 꽃을 삼성에서 피워보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잘해보고 싶은 생각에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몸이 아픈 게 가장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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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군에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그 분위기와 위치에 젖어들기도 했을 것 같다.

서동환  “젖어드느냐, 젖어들지 않느냐에 차이는 결국 ‘간절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선배들이 해주는 얘기도 귀에 안 들어오고 그저 2군에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기만 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야구에 대한 절실함이 짙어지면서는 젖어들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가끔 두산이나 삼성 2군 선수들이 연락을 한다. 나는 사실 조언을 해주기도 미안한 위치지만, 그 선수들 대부분은 조언보다는 위로를 필요로 하는 선수들이다. 만약 내가 야구를 잘 한 선수라면 나를 보고 희망을 얻고자 했겠지만, 그게 아니니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 나는 내가 느낀 그대로의 경험을 가지고 위로를 해준다. 세상에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갈래의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가든 내 길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니겠나.”

- 그러면서도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서동환  “자식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아빠,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나는 야구 선수이기 이전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늘 야구에 대한 갈증이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내가 무언가를 얻고 한국에 왔을 때 남들이 모르는 것을 공유할 수도 있다. 야구는 내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공은 한 번 던져보고 죽어야 한다. 때문에 몇 번의 수술과 선수 생활의 고비가 있었지만, 이겨내고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야옹미인 서동환 2편 내일 이어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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